
엘니도 마지막 날 - 잔치상 끝에 남겨진 허기'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'는 말이 있다.
엘니도는 내게 그런 곳이었다.
아름답기로 소문난 바다와 풍경, 수많은 여행자들이 들썩이는 열기 속에서 정작 내 여행자의 식탁은 텅 비어 있었다.
마치 보기만 좋은 잔치상에 앉아 허기를 삼켜야 했던 기분.
유명 관광지답게 가격이 다소 높은 건 이해했다.
하지만 타운 내 음식점 대부분은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.
이곳저곳 다니며 늘 시켜 먹던 익숙한 메뉴들을 선택한 내 탓도 있지만,
엘니도에서 먹은 음식은 그 익숙함조차 무색할 정도로 맛이 없었다.
심지어 익히지 않은 고기가 서빙된 적도 있었다.
말로만 BBQ인 그릴 포크는, 안쪽은 덜 익고 바깥은 타버린, 성의 없는 조리의 상징 같았다.

이곳 음식들은 대체로 서구식 입맛을 따라가려다 이도 저도 아닌, 어정쩡한 형태로 변질된 듯한 느낌이었다.
서양식인 듯 필리핀식인 듯, 정체성을 잃어버린 요리들.
피자나 파스타는 그나마 괜찮았지만, 내 입맛엔 어울리지 않았다.
게다가 음식은 맛이 없고, 가격은 비싸고, 종업원들의 태도는 무심했다.
그 모든 것이 겹쳐 엘니도 타운은 내게 불친절하고 피로한 기억으로 남는다.
그래서일까, 엘니도에 다시 온다면 타운 중심보다는 조금 떨어진 지역에 숙소를 잡고 싶다.
차창 밖으로 흘러가던 조용한 해변 마을들,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듯한 그곳들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.
밤의 분주함과 술잔 부딪히는 소리를 원한다면 타운도 좋겠지만, 나는 고요함 쪽이 더 끌렸다.

엘니도의 자연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, 그 위를 지나치는 수많은 발자국들이 풍경에 지침을 더한 것 같았다.
낮부터 술에 취한 채 돌아다니는 무례한 관광객들, 그리고 그들에게 지쳐 표정이 굳어버린 현지인들.
아마도 포트 바튼이라는 조용하고 따뜻한 마을을 먼저 보고 왔기 때문일까.
엘니도는 그 반대편의 풍경을 보여주었다.

그날 밤, 여행의 마지막 저녁은 해변과는 반대 방향 골목을 걷다 마주친 작은 로컬 식당에서 시작되었다.
간판도 허름하고 조명도 어두웠지만, 그 안에선 담백한 삶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.
주문한 메뉴는 '레촌 리엠포(Lechon Liempo)', 바삭하게 구운 돼지갈비부위 2인분.
함께 포장해온 옥수수로 만든 주먹밥, 그리고 간장과 칠리를 섞은 소스.
근처 가게에서 산 차가운 캔맥주까지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.

불빛 적은 방 안, 선풍기 소리와 함께 펼쳐진 조촐한 식탁 위에서
그동안 먹은 어느 한 끼보다 더 맛있고 소중한 저녁이 되었다.
엘니도의 마지막 밤, 가장 소박했던 저녁 식사는 가장 깊은 만족으로 남았다.
잔칫상 끝에 비로소 진짜 음식이 남겨져 있었던 셈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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